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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위 선열 > 석오 이동녕
석오 이 동 녕(李東寧) 선생 연보 (1869 ~ 1940)

자 : 봉소(鳳所)
호 : 석오(石吾), 안산(岸山), 암산(岩山)
관향 : 연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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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년 (1세) 10월 6일 충남 천안시 목천면 동리에서 의성군수 등을 역임한 교육자였던 연안이씨 이병욱의 장남으로 출생
1896년 (28세) 7월 독립협회에 가담, 간사원으로 개화민권을 통해 근대화에 기여하다.
1897년 (29세) 만민공동회를 열어 개혁을 위한 범국민운동을 전개하다가 이승만, 이준 등과 함께 투옥되다.
1898년 (30세) 33인의 한 사람인 옥파 이종일과 언론활동, 제국신문 사설을 집필하기 시작, 9월 25일자 「민족자강지방도」, 10월 28일자 「위국지방도」는 유명 논설, 향후 수년간 집필생활을 통해 민족사상을 정립하다.
1902년 (34세) 월남 이상재, 전덕기 목사 등과 함께 YMCA운동을 전개하다.
1904년 (36세) 한· 일의정서가 체결되자 서울상동교회에서 전덕기, 양기탁, 신채호, 조성환, 이시영 등과 함께 청년회를 조직하고 항일운동을 전개하다.
1905년 (37세)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동지들과 결사대를 조직, 대한문 앞에서 연좌데모를 벌리다 투옥되다.
1906년 (38세) 북간도(용정)에 가서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교육의 요람지인 서전의숙을 이상설, 박무림등과 설립, 약 1년간 제2세 교육에 헌신하다.
1907년
(39세) 4월 학원을 함께 운영하던 동지 이상설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한국대표로 떠나자 그는 일시 귀국, 양기탁, 전덕기, 이동휘, 이갑, 류동열, 안창호, 7인이 발기위원이 되어 신민회를 조직하다. 이는 우리나라로는 처음으로 체계 있고 조직화된 지하적 항일단체다.
총간사원으로 활동하다.
1910년 (42세) 12월 나라를 일제에 강점당하자 서간도에 이회영, 이시영 등과 함께 재차 망명, 한인의 자활기관인 경학사를 조직하고 이를 토대로 신흥강습소를 설립(후일 신흥무관학교) 이는 우리나라가 해외에 처음으로 세운 한국육군사관학교의 기원이다. 이때 석오는 초대 소장으로 군사 교육과 독립정신 고취에 헌신. 이에서 교육받은 3,500여명의 동량들은 그 후 대한광복군의 초석이 되다.
1915년 (47세) 이상설, 이동휘 등과 함께 독립운동자의 사업기관인 권업회를 조직, 대동신문, 해조신문 발행하다.
1919년
(51세) 1월 조소앙, 조완구, 김좌진, 여준 등 39명과 함께 무오독립선언서(대한독립선언서)를 내외에 선포, 이는 3·1독립선언에 앞선 것으로 역사에 특기할 만큼 일대 획기적인 사실이다. 이 선언서 서명에 신규식, 신채호, 박용만, 이승만, 김좌진, 안창호 등 해외 모든 독립운동자 39명이 총망라 되다.
2월 노령에서 중국 상해로 건너오다.
4월 8일 국내 각도대표와 해외대표들로 임시의정원을 구성, 초대의장으로 취임하다. 10, 11일 대한민국국호와 임시헌법, 관제등을 제정 공포하다.
4월 13일 이를 내외에 정식 선포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다. 새 내각의 내무총장으로 임시정부의 기초와 모든 기틀을 다짐.
1924년 (56세) 4월 국무총리로 정식취임(이전엔 국무총리대리로 임시정부를 지도) 군무총장을 겸임하고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 조선총독 사이토가 한인관리 홍승균에 밀명을 주어 석오의 일본귀화를 권유 했으나 이를 즉석에서 거절, 이후 모든 유혹 일체 거부하다.
1925년 (57세) 11월 두 번째(11) 의정원 의장으로 임시정부 최대의 진통기를 수습하다.
1927년 (59세) 4월 개정된 임시헌법하에서 처음으로 국무위원회 주석이 됨. 약화된 임시정부를 재건하다.
1929년 (61세) 3월 백범 김구와 함께 민족진영의 단합체인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초대 이사장으로 추대되다.
1930년 (62세) 의정원 의장과 두번째 국무위원회 주석을 겸임.
1932년 (64세) 1월 이봉창 의거와 4월 윤봉길 의거를 막후에서 백범 김구와 함께 지도 성공시키다. 가홍으로 피신하다.
1935년 (67세) 임시정부 세 번째 주석되다. 김구, 양우조, 엄항섭, 송병조, 이시영, 조성환, 차이석등과 함께 한국국민당 창당, 초대당수가 되다.
1937년 (69세) 7월 7일 중· 일 전쟁이 발발하자 한국국민당 대표로 범민족진영의 단합체인 대한광복진선을 구축하고 전시중 한민족의 진로를 모색, 11월 25일 이시영, 조성환, 김구, 송병조, 조완구, 차이석 등 7명의 이름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1차 포고문 선포, 군사정책으로 전환하다.
1939년
(71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백범 김구와 함께 전시내각을 구성. 11월 서안에 조성환을 대한군사특파단주임으로 선임하여 파견하다.>
12월 22일 이동녕, 이시영, 조성환, 김구, 송병조, 홍진, 류동열, 조완구, 차이석, 조소앙, 이청천의 이름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차 포고문 선포하다.
1940년 (72세) 3월 13일 하오 4시 40분 중국사천성기강 임시정부청사 2층에서 향년 72세를 1기로 조국광복의 한을 남긴채 서거. 임시정부로서는 처음으로 국장을 거행하다.
1948년 9월 22일 조국이 광복되자 백범 김구의 주선에 의해 석오의 유해를 서울 효창원(사회장)에 천장,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의 예우로 안장하여 오늘에 이르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대통령장)이 추서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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