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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위 선열 > 백범 김구
백범 김 구(金九) 선생 연보 (1876 ~ 1949)

호 : 백범(白凡)
일명 : 김창수(金昌洙), 김창암(金昌巖), 장진구, 백정선(白貞善)
관향 :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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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고종 13년 · 1세) 음 7월 11일 황해도 해주로부터 서쪽으로 80리 가량 떨어진 백운방 텃골(白雲坊基洞)에서 아버지 김순영(金淳泳)과 어머니 현풍곽씨 낙원(樂園)의 외아들로 태어나다.
1892년 (고종 29년 · 17세) 이해 우리나라 최후의 과거 경과(慶科)에 응시코자 해주(海州)로 갔으나, 매관매직을 일삼는 당시의 부패한 세정을 보고 실망하여 과거를 포기한 채 고향으로 돌아오다.
1893년 (고종 30년 · 18세) 정초에 동학교도 오응선을 찾아 종지를 들은 뒤 동학에 입도하고, 그리고 포덕에 힘을 기울인 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연비(連臂)를 수백 명이나 얻게 되어 동학 접주가 되다.
1894년
(고종 31년 · 19세) 보은에서 동학 제2세 교조 최시형을 만나 팔봉 도소 접주(八峰都所接主)란 첩지를 받다. 이곳에서 장차 제2세 교조 해월 최시형의 후계자로 대도주가 될 의암 손병희를 만나다.
이해 9월에 해주 죽산장에서 선봉장으로 7백 명의 총군(銃軍)을 거느리고 기병하여 해주를 습격하였으나 실패하다. 그 후 동학군을 토벌하기 위해 기의(起義)한 진사 안태훈(安泰勳 ; 安重根의 부친)과 서로 교전하지 않기로 밀약을 맺고 구월산으로 이진하였으나, 우군인 이동엽(李東燁)부대의 습격을 받아 대패하고 신천(信川) 청계동(淸溪洞)에 있는 안태훈의 의여소(議旅所)로 가서 우거하다.
1895년 (고종 32년 · 20세) 안태훈의 집에 우거하며 고능선(高能善)의 훈도들 받다. 그는 김형진(金亨鎭)과 의논하여 참빗장수와 황화(荒貨)장수로 가장하고, 평양을 거쳐 육로로 정평, 함흥, 삼수, 갑산을 지나 압록강 기슭을 돌아 남만주 삼도구에서 김이언(金利彦)의 의병 부대에 가담하다.
1896년
(건양 원년 · 21세) 안악으로 내려오는 도중 2월 하순에 치하포의 객주집에서 일본 육군 중위 쓰치다(土田讓亮)를 살해하고,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倭)를 죽였노라. 해주 백운방 기동 김창수”라고 쓴 포고문을 길가의 벽에 붙이게 한 뒤, 쓰치다의 행장 속에 들어 있던 엽전 8백 냥을 그곳에 사는 가난한 동포들에게 나누어 준 다음 신천으로 돌아오다. 그로부터 석 달 후인 5월 11일 새벽에 체포되어 두 달 동안 해주옥에 구금되다. 여기서 다리뼈가 드러나는 악형을 당했다.
7월 초에 다시 인천 감리영으로 이수(移囚)되다. 그동안 어머니 현풍곽씨가 감리영 삼문 밖의 객주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며, 매일 아침, 저녁으로 감옥안에 사식을 넣어 주는 등 아들의 옥바라지를 하다.
1897년 (광무 원년 · 22세) 심문을 받을 때마다 그는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왜구를 죽였다고 대답하다. 그는 감옥 중에서 「대학」을 읽고, 중국에서 발간된 「태서신사(泰西新史)」, 「세계지지」 등의 서양 역사책과 지리 서적을 읽어 세계의 정치, 문화, 경제, 과학 등에 접근하다. 이해 7월 27일에 사형에 처한다는 판결이 내리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8월 26일에 “김창수는 강도가 아니라 국모의 원수를 갚은 사람이므로 특사한다”는 고종황제의 특사령이 내렸으나,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의 압력으로 출옥하지 못하다.
1898년
(광무 2년 · 23세) 3월 9일 밤에 죄수들에게 먹인다고 옥사장에게 150냥을 주어 쌀, 고기와 모주 한 통을 사오게 하고 따로 스물다섯 냥을 주어 아편을 사먹으라고 해서 내 보낸 다음, 감옥의 바닥에 깐 박석을 들쳐 내고 땅을 파서 탈옥하다.
이해 늦가을에 계룡산 갑사를 거쳐 공주 마곡사로 들어가 용담 화상(龍潭和尙)에게서 계(戒)를 받고, 노고승 하은당(荷隱堂)의 제자가 되다. 법명을 원종(圓宗)이라 하다.
1899년
(광무 3년 · 24세) 마곡사를 떠나 서울 서대문 밖에 있는 새절로 오다. 그곳에서 다시 해주 수양산 신광사(神光寺)부근의 북암(北庵)이라는 암자에 머물며 텃골에 연락하여 4월 29일에 양친을 모셔오다. 그 후 평양으로 가서 간재 문인으로 이름 높은 극암 최재학(崔在學)의 소개로 대보산 영천암의 방주가 되어 부모와 같이 지내다.
이해 늦가을에 상투를 올리고 양친과 함께 해주 텃골로 돌아오다.
1904년 (광무 8년 · 29세) 신천 사평동의 준수한 최씨 따님 최준례(崔遵禮)와 결혼하다.
1909년
(융희 3년 · 34세) 황해도 서명의숙(西明義塾)에서 교원생활을 하다가 정월 18일에 안악으로 옮겨, 양산학교의 교원을 맡다. 또한 최광욱(崔光玉) 등과 함께 해서(海西)교육 총회를 조직하고 학무 총감을 맡다.
이해에 송화 군수의 초청으로 수 천 명의 청중 앞에서 “한국인이 배일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연제로 강연한 후 경찰서로 잡혀가 구류 당하다.
10월 26일에 안중근의사가 하얼빈 역두에서 이토오(伊藤博文)를 사살하자, 이 사건의 관련자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수감되었으나 불기소로 방면되다. 그 뒤 곧 안악으로 돌아와서 양산 학교 소학부에 유년반을 담임하면서 재령 북율면(北栗面) 보강학교(保强學校)의 교장으로 교육 사업에 심혈을 기울이다.
1910년 (융희 4년· 35세) 11월에 서울에서 양기탁의 이름으로 소집된 신민회 비밀회의에 황해도 대표로 참석하다. 이 회의에서 국내에서는 무력으로 항쟁하고, 국외에서는 동삼성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광복군을 양성하여 일제와 투쟁하기로 결의하다.
1911년 (36세) 안악 부호들을 협박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빼앗아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우려 했다는 소위 안명근 사건의 관련자로 정월 5일에 체포되다. 그 후 김홍량 등 양산학교 관계자들과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일곱 차례의 혹독한 심문을 받고, 징역 17년을 언도받아 서대문 감옥으로 넘어가다.
1913년 (38세) 일제의 국적에서 이탈하려는 의도로 옥중에서 이름의 “구(龜)”를 “구(九)”로 바꾸다. 백정의 “백(白)”과 범부(凡夫)의 “범(凡)”를 따서 호를 백범(白凡)이라 하다.
1919년 (44세) 전국적으로 3·1혁명이 일어나자, 동산평 농장을 떠나 사리원으로 가서 재목상의 행색으로 경의선 열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가다. 안동현에서 1주일을 묵은 뒤 동지 15명과 함께 이륭양 행의 배를 타고 4일 만에 상해 포동마두(浦東碼頭)에 도착하다. 안창호는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그에게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의 사령을 주다. 이동녕과 재회하다.
1923년 (48세) 이동녕 내무총장의 후임으로 그의 천거에 따라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에 취임하다.
1924년 (49세) 최준례가 둘째아들 신(信)을 낳은 뒤에 낙상하다. 이로 인한 폐렴으로 1월 1일에 세상을 떠나, 프랑스 조계 숭산로의 공동묘지에 안장하다.
1929년 (54세) 3월 25일 사상계에 혼란을 일으키던 공산주의자들을 제외하고, 민족진영의 단결을 도모하다. 이동녕, 이시영, 안창호, 조완구, 조소앙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하다.
1931년 (56세) 일제 괴뢰 정권의 수립으로 동삼성에서의 독립 투쟁이 궁지에 몰리자 임시정부의 명의를 피해 특수 비밀 결사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다. 이봉창 의사에게 일본 천황 저격에 사용 할 자금과 수류탄을 주어 도일케 하다. 이봉창 의사는 이듬해 1월 8일에 사쿠라다몽(櫻田門)에서 일본 천황에게 수류탄을 던졌으나 명중하지 않아 실패하고, 일본 관헌에 체포되어 순국하다.
1932년 (57세) 이해 윤봉길의사에게 폭탄을 주고,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열린 천장절 경축식장을 투폭하여 시라카와 대장과 노무라(野村吉三郞)사령관 등 10명을 살상케 하다. 일본 경찰이 이 두 사건의 배후 지령자로 그에게 전후 60만원의 현상금을 걸고 체포에 혈안이 되자, 미국인 피치목사 댁에 피신해 있다가 상해를 떠나 가흥으로 가서 장진구(張震球) 또는 장진(張震)이란 변성명으로 지내다.
1933년 (58세) 5월에 남경에서 장개석과 만나 하남성(河南省) 낙양군관 학교 분교를 한국 군관 양성소로 쓰기로 합의한 뒤 대일 전투 방책을 협의하다. 그 후 상해, 북경 등지의 한국 청년 1백여 명을 모집하고 이청천, 이범석 등을 교관으로 초빙하여 훈련시켰으나, 일본 영사 스마(須磨)의 강력한 항의를 받은 남경 정부에 의해 1기생 100여명을 내고 폐쇄령이 내려지다.
1938년 (63세) 여러 갈래로 갈라진 독립운동 진영을 통합하여 결전태세를 갖추기 위해 5월에 조선혁명당 본부인 남목청에서 회합하다. 이 때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의 3당 통합회의 석상에서 조선혁명당원 이운한의 권총에 맞아 중상을 입고 상아의원에 입원 치료를 받고 퇴원하다.
1939년 (64세) 중일전쟁이 점점 더 치열해지자 1백여 명의 동포를 이끌고, 임시정부를 광주로 옮겼다가 유주, 기강을 거쳐 다시 중경으로 옮기다.
1940년 (65세) 3월 이동녕을 사별하다. 독립 운동자들의 단결과 민족주의자들의 단일 정당의 조직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한국독립당의 이름 아래 3당을 통합하여 집행위원장에 추대되다. 또한 임시정부 국무회의의 주석으로 선출되다. 9월 17일 중경의 가릉빈관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이청천, 참모장에 이범석을 임명하다.
1941년 (66세) 일제가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다음날인 12월 9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5개항의 대일 선전포고문을 발표하다.
1944년
(69세) 개정된 헌법에 따라 2월에 국무위원을 개선하고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재선되었으며, 부주석에 김규식, 국무위원에 이시영 등을 선출하다.
이해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갔다가 탈출한 장준하, 김준엽등 50여명의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고, 미국 OSS합작으로 국내 침투를 위한 특수부대로 광복군특공대를 편성하여 국내 진공 작전을 계획하다.
1945년
(70세) 맏아들 인이 28세로 죽다.
8월 15일 저녁에 협서성에서 조국 해방의 소식을 듣고, 11월 5일에 중경을 떠나 상해로 와서 동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연설하다. 11월 23일에 김규식, 이시영 등 임시정부의 국무위원들과 미군수송기편으로 상해을 떠나 27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다. (제1진) 귀국 이튿날인 24일 상오 8시에 “전국 동포가 하나가 되어 우리의 국가 독립의 시간을 최소한도로 단축시키자”라는 귀국 방송을 하다.
이해 12월 27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우리나라에 대해 5년간의 신탁통치를 결정하자, 즉각 거족적인 반탁운동을 전개하다.
1948년
(72세) 3월에 유엔 소총회의에서 결의된 “가능한 지역에만 국한한 선거 실시” 결정에 반대 성명을 발표하다.
조국의 영구 분단을 막고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김규식의 발의로 4월 19일에 평양으로 가서 남북 정당 사회 단체협의회에 참석하여 완전 자주 통일을 위한 남북 협상을 마친 뒤, 조국 통일에 관한 공동 성명서를 발표하고 5월 5일에 서울로 돌아오다.
1949년 (74세) 6월 26일 낮 12시 36분에 경교장에서 현역 육군 소위 안두희의 저격을 받고 운명하다. 7월 5일에 전국민이 애도하는 가운데 국민장으로 의식을 거행하고 효창원에 안장되어 오늘에 이르다.
1962년 3월 1일에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대한민국장)이 추서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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