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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위 선열 > 매헌 윤봉길
매헌 윤 봉 길(尹奉吉) 선생 연보 (1908 ~ 1932)

호 : 매헌(梅軒)
관향 : 파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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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1세) 6월 21일 오후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枾梁里) 178번지에서 파평윤씨 황(璜)과 경주김씨 원상(元祥)의 맏아들로 태어나다.
1918년 (11세) 봄에 덕산공립보통학교(오늘의 덕산초등학교 전신) 제1학년에 입학하다.
1919년 (12세) 기미 3·1 혁명이 지방에 파급되자 일제의 비인도적인 온갖 만행을 지켜보며 식민지 노예 교육을 받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뒤, 보통학교를 퇴학. 서당 교육을 계속 받기로 하고, 마을의 최병대(崔秉大) 문하에서 동생 성의(聖儀) 등과 같이 한학 수업을 다시 하다.
1921년 (14세) 봄에 마을 인근 5리 지점에 있는 오치서숙(烏峙書塾)을 찾다. 본격적인 유학 교육을 받게 되다. 이 무렵에 신문《동아일보》와 잡지《개벽(開闢)》을 탐독하며, 농천 실태에도 눈이 뜨게 된다. 서숙에서 5언, 7언 등의 짓기 시작하다.
1922년 (15세) 오치서숙에서 20여세 된 동접들보다 그 실력이 출중하게 솟아나다.
이해에 성주배씨 용순(用順)과 결혼하다. (1989년에 작고하다)
1925년 (18세) 숙생(塾生)들과 함께 인근 수덕사에 가서 만공대 선사를 만나보고, 이 무렵까지 한시 절귀의 시집 『명추(鳴推)』, 『옥타(玉唾)』, 『임추(壬推)』 등을 쓰다. 시인, 묵객의 재질을 약관(弱冠)의 나이에 앞서 갖추다.
1926년 (19세) 오치서숙에서 휴게 시간에 건너편 덕숭산 기슭으로 발길을 옮겼다가, 모표 팻말을 한 아름 뽑아 가지고 내려오는 김해김씨의 무식한 시골 청년을 만나다. 시골 청년의 문맹(文盲)은 아버지의 묘소를 잃게 했지만, 민중의 무지는 나라를 잃게 했다는 충격적인 깨달음으로 농촌 계몽운동에 큰 뜻을 두다. 가을에 사랑채에 야학당을 차리고 문맹 타파를 통한 농촌 계몽 운동에 첫발을 내딛다.
1927년 (20세) 「농민독본」을 저술하다. 모두 세권으로 된 유인물(油印物) 책자였는데, 오늘날에는 제2권 「계몽편」과 제3권 「농민의 앞길」이 남아 있다.
1929년 (22세) 정초부터 1년 동안 「기사년(己巳年) 일기」를 쓰다. 부흥원 설립 기념의 학예회로 촌극(寸劇)「 토끼와 여우」를 공연하다. 이로 인하여 일제 식민 정책의 풍자 혐의로 경찰에 불려 다니며 당국의 주의를 받다. 지방 농민들을 규합하고 자활적인 농천 진흥책으로 성인을 동원하여 4월23일에는 월진회(月進會) 조직, 회장에 자신이 선임되다.
11월 3일, 광주 학생 운동에 비상한 자극과 충격을 받다. 이를 계기로 하여 농촌 부흥운동만으로는 민족의 자유와 민중의 평들을 달성할 수 없다는 깨달음 속에서 직접적인 민족 혁명 투쟁에로의 방향 전환에 눈이 뜨다.
1930년 (23세) 3월5일, 어머님과 작별하고 저녁 때 부흥원 야학회에서 고별인사. 이튿날‘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의 유서를 써 놓고 머나먼 망명길을 목표, 상행열차에 몸을 싣다.
1931년 (24세) 5월8일, 상해에 도착하다. 상해 도착 후 프랑스 조계 하비로 화합방(和合坊) 동포석로(東浦石路) 91호에 있는 안중근 의사의 계씨 안공근(安恭根)의 집 3층에 숙소를 정하고, 한인 동포 실업인 박진 경영의 중국 채품 공사에 취직, 말총 모자 등을 만드는 직공으로 근무하며 한인 공우 친목회(韓人工友親睦會)도 조직하다.
1932년 (25세) 이른 봄부터 상해 홍구 일대에서 계춘건(桂春建)과 야채상을 하며 일본군 관계 정보 탐지를 하던 어느 날, 박진의 소개로 상해 임시 정부 국무위원 겸 한인 거류민단장 김구와 비밀 접촉하다. 젊은 청년을 만나 본 백범은 “노소의 차이가 있을 뿐 민족 혁명 대업을 위한 다시없는 큰 동지를 얻었다”하며 스스로 흡족해 하다. 1월8일, 김구가 주도한 한인 애국단 이봉창 의사의 의거-일본 천왕 사살미수-에 자극되어 새로운 결의를 마음속에 굳히면서 이달 31일자로「어머님 전 상서」를 본국에 보내다.
2월 말경에서 3월 초순 사이 중국군 제19로군 정보국장 겸 병공창 주임인 왕웅(金弘壹의 중국이름)의 주선으로 일본군 병기창 폭파 계획에 동원되어, 너덧 명의 청년들과 영내 하역 작업을 하며 기회를 엿보았나 미수에 그치다.
4월 20일자 상해 발행의 일본인 신문인 《상해일일신문》을 통하여 다가오는 4월 29일, 이른바 천장절 기념 및 전숭 축하 기념의 행사에 대한 기사를 읽다. 일본 히로히토 천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에 상해 사변의 승리 기념식도 겸하는 대대적인 행사를 신공원이라고도 불리는 홍구 공원에서 개최함에 있어서, 점심 도시락과 물통 그리고 일장기를 휴대하고 일본인은 누구나 참관할 수 있다는 신문 보도에 백범을 찾아가 상의하다. 김구는 김홍일을 통해 당일 휴대할 물통 모양의 폭탄과 도시락 모양의 폭탄을 즉시 만들도록 지시하다. 김홍일은 상해 병공창 창장 송식표 및 기사 왕백수의 적극적인 협조와 김영재(金英哉 : 金弘壹의 조카)의 도움을 받으며, 1·8 이봉창 의사 거사 때보다 훨씬 더 성능이 좋은 폭탄을 만들다. 그는 4월 26일, 프랑스 조계 패륵로 동방 공우 30호에 은거하며 백범과의 모든 거사 준비가 완료되자, 거류민단 사무실에 가서 한인애국단 입단 선서식을 거행, 4월29일, 홍구공원에서 마침내 시라카와 대장 등 10명 살상케하는 의거에 성공하다.
5월 18일, 오사카에 압송 위수형무소에 수감되다. 6월21일 제4사단 군법회의에서 사형언도 되다. 12월 19일 가나자와 시의 일본육군 공병 미지고우시(三小牛) 작업장에서 순국하다. 향년25세
1946년 6월 16일 유해가 일본으로부터 봉환되어 6월30일 효창원에서 이봉창, 백정기 위사와 함께 광복 후 첫 국민장으로 봉안되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대한민국장)이 추서되다.
1965년 12월 29일 윤봉길 기념사업회 창립
1975년 4월 29일 향리에 윤의사 동상건립, 8월 29일 매헌장학재단 장학금 지급하다.
1989년 4월 29일 서울 양재동에 윤의사 기념관 준공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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